이별은 한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분명 서서히 다가온다.
하지만 이별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는 시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중대할 수도, 혹은 아주 사소할 수도 있는 어떤 사건이나 생각에 의해
이별의 결심은 서게 된다.
예전에 사귀던 남자친구와의 일이다.
만난 지 1년 6개월쯤 될 무렵 직장 문제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다.
서로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장거리 연애는 정말 힘들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란 말이 나에겐 해당되지 않을 줄 알았지만
<존재하긴 하지만 만나기 힘든 애인>은 물리적 거리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장거리 연애는 주로 전화를 많이 이용하게 되는데
시작되는 연인들에게 전화통화는 사랑이 싹트는 수단이지만
무르익은 연인들에게 만남 대신 통화는 싸움의 시작이 되었다.
가까이서 챙겨주지 못해 미안해 하면서도
언제나 전화 말미에는 내가 혹시 바람을 피지 않을까 매번 의심하는 듯한 말을 했다.
나 역시도 사소한 말 한마디에 트집이 나왔고 그러다보면 싸우고, 또 화해하고...
소모적인 반복이 계속되었다. (이때부터 우리 관계가 끝나간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를 해서 혼자 짐정리를 한 뒤
좌식 의자를 하나 사야겠다 싶어 마트에 시장을 보러 갔는데,
혼자서 그 무거운 의자를 낑낑대며 택시를 타고 오게 되었다.
너무나 서러움이 밀려왔다.
(당시엔 내가 차를 갖고 있지 않았고, 택시도 잘 안 잡히고, 춥고...너무 고생스러웠다.)
그 날 저녁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또 싸우게 되었고
결국 그날 밤 나는 이별을 결심했다.
물론 애인을 머슴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어쨋든 < 무거운 의자를 낑낑대며 혼자 들고 온 일>이 이별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예전에 한 친구에게서 들은 이별의 계기 역시 한순간 이었다고 했다.
그 친구는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첨엔 몰랐는데 갈수록 드러나는
그의 야망 없음과 열정 없이 게으른 모습에 실망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나중엔 어느새 자신이 그를 윽박지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집에서 <서랍 안에 가득 흩어져 있는 복권>을 발견하고는
그와 이별을 결심했다고 한다.
나는 뭐 재미로 복권 정도야 살 수 있지 않느냐 라고 했지만
그녀는 일단 복권을 사는 것 자체가 싫고,
둘째 한참 젊은 사람이 노력과 열정이 아닌 복권에 희망을 건다는 것이 너무 싫었고
세 번째로 그가 그냥 재미로 한번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사 모으는 것이라 싫다는 것 이었다
나는 얼마 전 또 이별을 결심하는 계기를 만났다.
이제 류와의 이별을 결심했다.
몰론 그 계기 역시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 부터 뭔가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느낌을 가졌다.
우리는 사랑일까? 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결론은 <아닌 것 같다> 이다.
혹시나 사랑일까? 했지만 역시나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속상한 일이 있어서 한밤중에 친구를 불러내 술을 마셨다.
류를 불러야 했지만 그를 부를 수가 없었다.
우리 집과는 너무 먼데다가 이 늦은 밤에 그를 불러내었으면
<불러낸 댓가(?)>를 치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전에도 새벽에 그를 불러서 이야기만 하다 돌려보냈더니
농담처럼 ‘불씨를 당겼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냥 보내는게 어딨냐’며 몹시 서운해했다.
점점 더 그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우리는 그저 섹스만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한밤중에 불러내기에 더 맘 편한 사람이 남자 친구보다 여자 친구인 것일까? >
이야기가 하고 싶은데 그를 만나면 섹스에 대한 부담감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류와 어정쩡한 친구 사이로 남기 싫었지만 한번 씩 전화하고, 가끔은 얼굴을 보기도 하자고 해버렸다.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해도 아마 자연스레 멀어질 것이다.
솔직히 나는 그에게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었는데 그냥 “ 미안해” 라는 말이 나왔다.
그는 “ 내가 더 잘못한 게 많은 것 같다.” 라고 말했다.
그가 분명 좋았던 것 같긴 한데 우리 사이엔 뭔가 교감이 없었다.
그를 완전히 믿을 수도 없었고, 그가 완전히 편안하지도 않았다.
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당분간 쓸쓸하고, 심심하고, 허전하겠지만 (비비는 여름 휴가까지만 버티라고 했지만 -.-;)
난 아마 곧 괜찮아 질 것이다.